한국/한국정치

드라마 대조영--대중상과 조영, 백제성을 무사히 탈출할까?

이호(李浩) 2006. 11. 5. 23:28

드라마 대조영

 

    백제성을 무사히 탈출할 있을까, 대중상과 조영!!

 

   백제성이 도대체 어디쯤에 있는 ()일까? 드라마에서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자세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위치가 중요하진 않겠지. 백제멸망(660) 조정의 신하들은 일본으로 많이 망명했고, 백제성 촌장처럼 반도와 대륙의 곳곳에 흩어져 부흥운동을 꾀한 유지자(有志者)들도 꽤나 있었다..   

대중상과 조영과 걸사비우 등은, 바로 백제의 유지자(有志者) 한명이 백제의 부흥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백제성으로 잠입하여, 같은 반도(半島)인으로서 도움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조영은, 앞으로 발해 건국에 있어 많은 지략을 펼쳐보일 책사 미모사 조우하게 됐다.

 

   안시성

 

드라마는 지금, 2 고당전쟁과 대중상-조영 부자의 곤란한 처지를, 전쟁 씬과 함께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한번 숨을 고르고 이웃나라 사정을 살펴보자.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 일본에서는 사이메이 천황(齊明 天皇) (37) 통치하고 있었다. 女황제였다. 사이메이 女천황이 백제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유신(遺臣)들을 구원해 것이다.

46세기에 걸쳐 백제로부터 선진문화를 직접 받아들여 크게 도움을 입었던 일본으로서는, 백제의 멸망을 그냥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女천황이 661 죽자, 조정에서는 나카노오오에(中大兄) 황태자 실권을 잡는다. 661년부터 666년까지의 5년간은 (천황은 공석으로 ) 황태자의 이름으로 통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바로 나카노오오에(中大兄) 황태자가 백제의 입장으로 보면, 아니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고마운일을 해준 황태자이다. 663 일본 조정은 백제부흥을 위해 3만여명의 지원병을 파병했다.           .   

그러나 지원군은 백촌강(白村江)에서 나당연합군에 대패, 후로 일본 조정은 나당연합군에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된다. 백제원정에서 대패, 패전의 쓰라림을 안은 채 나카노오오에(中大兄) 황태자는 드디어 666 천황에 즉위하게 된다. 이가 38 텐지천황(天智天皇, 재위: 666671) 되는 것이다.

텐지천황 唐과 新羅軍의 위협이 날로 심해지자, 자구책으로서 체제정비를 서둘러 국내적으로는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국가(체제) 완성코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669 텐지천황은 국호 日本으로 새로 정했다. 이리하여 唐과 新羅로부터 왜국(倭國)으로 불린 모멸감을 완전히 씻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백제에 지원병을 파견하는 출혈을 감수하며 백제를 도왔기 때문에, 일본은 唐과 新羅로부터 국가안전보장을 위협받는 궁지에 몰렸으나, 그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국호(국명) 새것으로 했고,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해 나갈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역시 사람관계에 있어서나, 국제관계에 있어서나 도울 일은 돕고 일인가? ” 결과적으로는, (지원병 파견) 하여, 일본은日本이라는 국명을 얻었고 체제정비도 서두를 있었기 때문이다. ( 계속)

 

 

   (→계속신라는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해야만 했는가? 삼국 공존하는 평화공존 길은 없었는가? 전쟁을 하더라도 삼한 세력끼리 했어야지, 외세() 끌어들였는고?

신라는 전쟁을 하려면 확실한 역량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해야 했다. 신라에 의한 반도의 엉성한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 광활한 고구려의 땅을 잃어버리게 , 소극적이고 봉합적인 것이었다.

         

「한반도」과 「조선」의 영토를 축소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또하나의 무리들이 있다. 바로 김일성-김정일 부자세습정권이다. 이들은 백두산과 천지 주변에 대한 영유권의 거의 절반을 중국측에 넘겨 주었다. 공짜로 넘기다 시피 한 것이다. 6,25 때 대군을 파병해준 것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빚 갚음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나,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이지, 김부자 체제의 개인 소유재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도문제를 보더라도 북한의 태도는, 영토를 찾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는 듯이 보인다. 사실 간도 땅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그 영토권문제가 불거져 있었으나,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관계로 조선땅이라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따기 위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 있는 간도를 청국에 이관해 주는 -淸 간도협약(1909)을 맺은 것이다. (일본도 처음에는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여 용정촌에 통감부의 출장소, 간도 파출소 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남만철도(南滿鐵道)의 개축 문제로 淸과 대립하자, 간도 땅을 淸에 내주고 남만주의 철도부설권을 따 낸 것이었다. ) 

 

     남만주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1951 9월 체결된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일제의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조인된 영토조약은 모두 무효라고 명기하고 있고, 따라서 한반도, 타이완, 팽호도(澎湖島), 남사할린 등은 모두 원래 위치로 귀속하게 된다.

여기서 간도협약도 무효처리되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간다. 그러면 간도문제는 조선과 청의 분쟁 상태로 되돌아 간다. 여기서 조선(남북한)의 입장이 청(중국)의 입장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우선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고, 또 일제도 처음에 조선의 땅임을 인정하여 출장소, 파출소 등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인데도, 북한은 중국에 대해 간도문제를 놓고 입도 한번 뻥끗하지 못했다. 중국측에 이의 제기 한번 못하고 선선히 간도땅을 내준 것이다. 6.25때 중공군 파견으로 인해 빚을 진 북한의 입장에서는, 중국에 거역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는지는 모른다. 중국과 북한은 -淸 간도협약을 추인해 버리는 어떤절차를 이미 가졌을 수도 있다. 한국은 그 당시 중국과 국교도 없었고, 대화 채널이 없었기 때문에, 이 간도문제로 중국측과 협상하거나 다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어차피 드라마 대조영에서의 고당전쟁의 재연과 발해의 건국으로,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의 역사관, 역사를 보는 시점(視点) 등이 또다시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러나, 대중상-조영 부자는 빨리 백제성을 벗어나 고구려도 되돌아 가시게나고구려가 그대들을 부르고 있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