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1945」/「서울1945」への道しるべ

추억의 게시판 글--'서울 1945'에서의 이승만과 '최운혁'

이호(李浩) 2013. 11. 14. 14:16

 

추억의 게시판 글

이글은 2006년 01월 07부터 2006년 09월 10일까지 방영된 KBS1 드라마 "서울1945"(총 71부작) 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서울1945」--

이승만과 최운혁’ : “ 운혁은  들었는가?”


 

<2006 8월말-9월초의 어느날 ()>



 

 

게시판에서 어느 님이 운혁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면서 운혁은 들었는가 의문시하고, 운혁 과오는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계시더군요.

물론 과오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님은 드라마의 넓은 맥락은 보지 않고, ‘운혁 총을 잡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에만 집착하고 계신 같군요.

그러면 이승만 박사는 어땠나요? 망명시절부터 독립운동 하신 인정하여 드립니다 (하와이에서 애지중지 사탕수수밭을 재배하시기도 했구요?). 그러나 이박사도 해방정국에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 주장했습니다.

당시 정부도 머리는 좋지만 고집센 노인네가 무슨 일을 벌일지많이 걱정들 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을 긴장시킬 정도로 박사의 ‘(무력)북진통일론 기세등등했습니다.

그러면 김일성과 이박사가 다른 점이 뭐가 있나요? 둘다 무력(폭력) 의한 통일방식이었습니다. , 이박사는 그러나 전쟁을 일으켰다고요? 김일성이 먼저 일으켰으니, 이박사님은 이쁘게 봐주실 있다고요?

 

그러면 영화 한편 감상하여 보시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시다. ‘성공(출세) 위한 살인이란 테마로 상영되어 아메리카 사회에 파문을 던진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영화를 한번 감상해 보십시다.. 출세의 화신 몽고메리 클리프트 부잣집 (엘리자베스 테일러 ) 결혼하기 위해 때까지 사귀어온 순정적인 고향처녀(셜리 윈터스 ) 죽일려고 살의(殺意) 품습니다. ‘클리프트 실제로 죽이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지만, ‘셜리 윈터스 결국 목숨을 잃고, ‘클리프트 살의를 가졌다는 자체만으로 법정에서 사형선고 받습니다. 이를 이박사님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면 무리인가요?

 

좀더 쉽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님이 숙성한 딸들을 어머니라고 한번 가정을 보지요. 어느 치한이 강간의도를 품고 호시탐탐 님의 딸들을 노리고 있다면, 실제로 강간이 일어났다고 해서, 님은 강간의도범() 이쁘게 주실 있나요?

 

김일성과 이박사----과연 무엇이 달랐을까요? 아니오! 둘은 아주 닮았었습니다. 현실주의자(realist)로서, 냉전체제하의 국제정세를 숙지하는 데에 있었서도 닮았고, 그래서 () 그는 민주기지론으로 밀어붙여 인민공화국 건설해 갔고, () 그분은 단정(단독정부)으로 밀어붙여 민주공화국 발전(?)시켜셨습니다. 둘이 배포가 서로 맞았던 것입니다.

권력지향적 정치가들이 판치는 그들의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하셨던 김구 선생(한국의 드골) 업적도 희석되었고, 우리들로 하여금 선생에 부끄러운 후손이 되게 했습니다.

 

, 생각났습니다. 김일성과 이박사님이 달랐던 . 그것은, 전쟁론이 오가던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시키는 재주 있어서 전쟁을 일으킬 있었으나, 박사님은 미국을 설득시킬 역량 부족하여 전쟁을 일으켰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거 어찌합니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꾸 이박사님께 죄송해지는 증언을 하게 되네요. 9.28서울 수복한 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팔선을 넘어 북진할 이박사와 미군(유엔군)측은 또한번 부딛쳐야 했습니다. 물론 한국(남한) 국민의 입장에서 ", 그때 어찌됐든 간에 통일을 이뤘었으면" 하고 바랬던 우리들의 입장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미국이 북진 원치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트루만 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트루만 독트린(1947) 의해 냉전체제가 고착화되는 시기였습니다. 1947 트루만은 냉전시대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원칙 세계 앞에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억지(抑止, deterrence) 봉쇄(封鎖, containment)였습니다. 후에는 ‘롤백(roll-back)’정책과 ‘데탕트(Detente)’가 ‘원칙’으로 추가되었습니다. 이 때의 ‘억지’와 ‘봉쇄’는 공산주의에 대해 수세적인 것으로서, 이박사의 공세적인 북진통일(10.1 삼팔선 돌파)과는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후의 원칙인 ‘롤백(roll-back) 정책으로 설명을 하더라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삼팔선까지가 경계였습니다. 거기까지가 실지 회복으로서의 롤백정책의 적용지역입니다. 그러니 이박사님과 미국측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박사의 명령에 의해 국군이 독단적으로 삼팔선을 넘자, 미군과 유엔군측은 이미 엎질러진 이라 없이 삼팔선을 따라 넘고 국군의 뒷치닥거리 해준 셈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면, 김일성이 무력에 의한 선공을 펼쳤다면, 이박사님도 무력에 의한 후공을 펼친 셈이 되네요?

이처럼 이박사도 무력을 사용했고 잡았는데, 운혁 잡은 것만에 그렇게 집착하십니까? , 건국의 아버지 이박사를 어찌 일개 운혁 비교하느냐구요? 그렇겠습니다. 망명시절 하와이에서 사탕수수밭을 경작하면서 유한계급과 어울리기도 했던 박사님과, 레닌그라드의 땅에서 민족을 절규했던 일개 운혁 어찌 같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승만 박사님은 감성을 갖춘 분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민요 매기의 추억 그리 좋아하셨다지요. 하지만 그것은 요즘 흔한 말로 이야기되는 미제향수(노스탤지어) 아닌가요? 차라리 미국 도망시절 숨어서 오빠 생각 하모니카로 연주하던 이동우 국산 향수라 좋았습니다. 차라리 서울1945 게시판 손님 서석찬 님의 청산에 살리라 국산 향수이고 신선해서 좋았습니다. 향수타령이냐구요? 하하, 이번 기회에 서석찬님에게 향수 ()’ 한번 시상해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배우 김진규가 열연한 이박사님 영화를 한편 적이 있습니다. 고종황제 시절부터 투옥되기도 하셨고, 억압받는 조선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도 하셨고, 끝내 미국에 망명하신 스토리에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박사님의 전부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념 가치관 틀을 떠나서 바라보면, 박사님은 정말 매력있고 훌룡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박사님을 옹호하는 님들도 이념 가치관 떠나서 서울1945”에서의 운혁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공정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지만 박사님의 북진통일론 너무나 아쉽다고요? “어쨌거나 잘만 밀어부쳤으면 통일을 완수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신다고요? 아쉬움을 누르세요. 어짜피 북진통일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중공군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있어 북한 땅은 아주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습니다. 북한이라는 완충지역(buffer zone) 없이 미국의 자본주의 세력권과 바로 코앞에서 국경을 맞부딛친다고 했을 , 중국에 있어서는 엄청난 위협threat’ 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중공정부수립 초기 나라사정이 어수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면서도 대군을 파병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앞마당(북한 ) 버퍼존으로 확실히 지키겠다는 중공측의 의사표시였었습니다.

 

중국의 입장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탈냉전의 시대라 하지만 지금 미국에는 부쉬정권하에서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세계전략을 왔습니다. 냉전시대의 세계전략이 억지 봉쇄로서 수세적인 것이었다면, 지금의 부쉬정권은 선제공격a preemptive strike, ‘예방전쟁a preventive war까지 들먹이면서 확대된 세계전략을 펼치고 있고, 아주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탈냉전 시대 미국의 대항마(對抗馬) 자처하는 중국으로서는 위협을 느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일이 국제사회에서 저런 ‘폭력’과 깡패짓 행하고 다녀도, 중국은 북한을 품어 안을 밖에 없습니다. 만약 지금의 김정일 체제가 무너져 미국과 일본의 ‘MD(미사일 디펜스) 라인 압록강 부근까지 북상해 온다면, 미국의 세력권하에 북한이 놓이게 된다면, 중국은 엄청난 안보(安保)상의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이 저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북한을 데리고 가야 하는 처지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한반도의 통일에 있어, 미우나 고우나 때국놈들 쳐부수든지 아니면 그들과 타협을 하든지 하는 수순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동태를 눈여겨 봐야 합니다.

, 한가지만 여러분들의 이성에 호소하고 싶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초기단계는 그렇게 비인간적이지도 그렇게 잔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경우, 독재자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면서 폭압적인 체제로 변질되었습니다. 레닌의 시대는 그런대로 수는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 때는 트로츠키도 레닌과 함께 하고 있었고…… , “좁은 저자 앙드레 지이드가 생각나는군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지이드는 이제서야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왔다 환호했습니다. 이미 세계적인 작가로 검증이 끝나 있는 앙드레 지이드입니다. 작가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를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물론 앙드레 지이드는 그후 러시아혁명이 변질되어 가자 무척 실망하였고,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생을 마칩니다. )

 

드라마에서 운혁 성장기간도, ‘운혁 사회주의 실천기간도 모두 사회주의 초기 단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스탈린을 포함한 스탈린 이후 시대의 시점(視点)에서 운혁 재단하지 마시시 바랍니다. 지금의 김정일 체제를 보는 잣대로 운혁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운혁의 선택과 운혁이 잡았다는 사실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 받을 있는 거라면, 운혁이 자기가 범한 오류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순서가 틀린 같습니다. 운혁 이전에 엄중한 비판을 받아야 사람들과 조직, 세력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해방정국에서의 너무나도 빨랐던 단정(단독정부)’, 친일파 단죄 (중지) 문제 등등.

드골(프랑스의 김구) 나찌에 협조했던 자들에게 추상 같은 엄벌을 내려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성공했습니다. 그런 드골은 바보였고 박사님만 현명하셨나요? 비판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먼저 엄중히 비판하고, 그리고나서 운혁 제대로 한번 비판하시기 바랍니다..

동안 서울1945” 드라마를 보면서 게시판을 통해 님들과 같이 호흡하고 부대껴 왔습니다. 제 글에 대해 여러 관심과 공감과 지적과 비평을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6 8월말-9월초의 어느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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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紀行


왜 산에 오르는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Everest) 등지에 오르려 하는가?

 

대답(正解): 산(山)이 있어서 산에 간다

    * 몸에 좋음. 건강.

      * 성취감

      * 초-중-고-대

 

 

 

에베레스트、エベレストエヴェレスト: Everest)、

またはチョモランマチベット語: ཇོ་མོ་གླང་མ Chomolungma, Qomolangma: 珠穆朗玛峰 Zhūmùlǎngmǎ Fēng)、

またはサガルマータネパール語: सगरमाथा Sagarmāthā)は、

ヒマラヤ山脈にある世界最高峰

英称“エベレスト”はインド測量局長官を務めたジョージ・エベレスト (George Everest) から取り命名された。

1920年代から長きにわたる挑戦の末、1953年に英国探検隊のメンバーでニュージーランド出身の登山家エドモンド・ヒラリーチベット出身のシェルパ テンジン・ノルゲイによって初登頂がなされた。

 

 

@ http://ja.wikipedia.org/wiki/%E3%82%A8%E3%83%99%E3%83%AC%E3%82%B9%E3%8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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