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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조영--초린 : ‘사랑’이냐, ‘조국’이냐?

이호(李浩) 2006. 12. 18. 21:49

드라마 대조영

 

                    초린----‘사랑이냐, ‘조국이냐?

 

초린의 운명이 점점 가혹해지고 있다. “사랑이냐, 조국이냐 놓고, 어느쪽인지를 ()해야 하는, 둘중 하나를 선택을 해야하는, 그런 입장에 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헤아릴 없는 슬픔 혼자 지닌 , 비탈진 인생길에 시달리면서, 아아, ()해야 한다기에 고통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  사랑이냐, 조국이냐 놓고 갈등을 벌인 여인의 슬픈 일생은, 때때로 우리들 앞에 다가와, 동정심을 유발시키기도 하고, 냉정한 비판에 노출당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여기서 선택지中의 하나인 사랑 대상이 사람()’이다. 사람중에서도 남자(男子)’이다. 초린의 경우, 게다가, 적국의 기린아조영이 사랑의 대상이다.

  초린은 해서는 안되는, 따먹어서는 안되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구약성서 창세기에서도, ‘이브(해와)’쪽에서 에덴동산에서 먼저 아담 유혹했고, 그리고 둘이서 질펀한 사랑놀음을 펼친다.

  그런데 그것이 여성의 본성인데, 그리고 고금을 막론하고 지구상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평균적인 의식수준이 그러한데, 그것을 어이 막을 수가 있으랴? 에덴동산에서 절대자라던 (이른바 하나님), 남녀간의 정분과 사랑을, 바로 자기 코앞에서도 막질 못했었는데

 

 영화 "The Greek Tycoon"(1978). 오나시스(안소니 퀸 분)와 재클린(재클린 비셋 분)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기 위하여 두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1)      1963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대통령 부인 재클린 케네디는 1968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한다. 남편이 암살당한 지 거의 5년 만의 재혼이다. 이 때 재클린의 나이는 30대 중후반였고, 오나시스는 황혼의 시기(62)였다, 이는 당시 美 사회전체에 엄청난 파문을 던졌다. 세계 최고지도국의 퍼스트레이디 출신이 나라(미국)의 위신과 위엄을 버리고,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난 것에 대해, 미국 매스콤은 1면 톱기사를 박박 써대며 난리법석을 떨었었다.

재클린은 물론 前퍼스트 레이디로서 존중해내야 할 미국의 체면과 자만심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최계최강국인 조국의 자만심과 프라이드를 덜 중시한 측면은 있었다. 자신의 새로운 남자를 더 중요시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사랑이냐, 조국이냐? 물음 앞에서, 재클린은 조국 중요시 것이 아니라, 다만사랑 중요시했던 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재클린(재클린 비셋 분)과 오나시스(안소니 퀸 분)

 

(2)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일본 여자 배구팀은 강적 소련을 3 : 0으로 격파하고 금메달릉 땄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전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일본 여자 배구팀은 동양의 마녀로 불리면서 세계정상에 섰었다. 1976년의 몬트리올 올림픽에서의 금메달로 東洋魔女 탄생, 일본여자배구의 전설은 이어졌다. 일본팀에 대형 스파이커가 있었다. 그녀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본팀의 에이스 스파이커로서 금메달을 따는데 크게 공헌했다. 바로 시라이 다카코(白井貴子) 선수다. 시라이(白井) 우선 키가 컸고 파괴력이 뛰어났으며 임기응변의 공격에도 능했다.

  70년대 한국 여자배구팀도 날으는 작은 조혜정 활약으로, 난적 쿠바도 꺾을 있었고, 장신군단 독일도 무너뜨릴 있었다. 일본이 금메달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에서, 한국은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인 동메달을 획득하여 온국민을 기쁘게 했었다.   

   1970년대 한국 여자배구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으나, 일본에는 번번히 졌다. 바로 시라이(白井)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라이의 가공할 스파이크는 한국 코트를 초토화시켜 버리기 일쑤였다. 작은 조혜정이 아무리 날아 보았으나, 시라이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시라이를 중심으로 일본팀의 파괴력-속공-철옹성 수비로 결국 일본 여자배구팀은 올림픽 金을 안으면서 70년대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1980-90년대에 들어 일본배구도 침체기에 접어 들었고, 현재까지도 국제대회에서 그리 좋은 성적은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여자배구가 국제대회에서 고전할 때마다 일본국민들은 시라이(白井) 대한 동경을 감추지 못하고 있고, 그녀에 대한 향수를 표출시키고 있다.

 

 

 일본여자배구팀

 

  본론을 이야기 하자. 시라이(白井) 국적이 한국인 재일교포였다. 시라이의 부모도 모두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시라이(白井), 유망주 시절,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민족의 뿌리에 대한 갈망으로 적지 않게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한국 실업팀에서 있디 않을까 싶어 여러 실업팀들의 문을 많이도 노크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데 것이 결국 허사였다. 시라이(白井) 눈물을 뿌리며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왔다.

 

  이미자 , 시라이(白井) 위로하는 노래 불러 주시면 어떻습니까?

   --------안녕 안녕 조국이여 안녕. 그리운 찾아 바다 건너 천리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님의 마음 변하고 나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님계시는 조국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조국이여 안녕.---------  

  시라이는 결국 일본에 돌아와 일본에 귀화, 일본여자배구의 역사에 남을 선수가 되고 말았다.

 

만약, 시라이(白井) 한국땅에서 뛰게 되고 한국대표팀 선수가 됐다면, 70년대 한국팀은 세계대회와 올림픽 등을 제패하는 팀이 되었으리라. 1960년대 박신자가 이끈 농구 대표팀이 세계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는 한국농구를 빛냈드시, 1970년대는 틀림없이 한국여자배구의 시대가 열렸을 것이다.

결국 시라이(白井), 누구 책임인지는 모르나, ‘조국보다는 사랑 선택했다. 여기서 사랑 대상 물론 사람(남자)’ 아닌 배구이다. 결심이 끝나자마자 시라이(白井)에게는 조국따위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오직 배구 대한 사랑에만 투입했다. 1970년대 그렇게도 매섭게 한국 코트를 맹폭한 시라이(白井)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초린. 그러면 너는 과연 어떻게 것인가? 위의 여인은 결과적으로는 조국보다는 사랑 선택했어. 초린 어쩔래? 너야말로 참으로 슬픈 <여자의 일생>이로구나!

이미자 ! 초린를 위해  여자의 일생 다시 한번 불러주시지요.           

------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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