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게이샤의 추억(SAYURI)"과 황진이
( Memoirs of A Geisha) 2006년 10월 17일(火)
미국의 '댈비(Liza Dalby)'라는 여인은 1974-1975년 일본에서 게이샤들의 생활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1978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물론 그녀의 논문은, 인류학적 시각에서,동양사회의 한 전통으로 남아있는 게이샤 사회의 문화적 가치를 재평가했을 것이리라.
댈비는 1998년 자기의 생생한 체험을 떠올리면서 Geisha 라는 대중적인 책을 내놓는다. 여기에 영화귀재 스티븐 스필버그가 달려 든다.
그러나 정작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후원, 추진만 해주고, 메가폰을 잡은 것은 롭 마샬 감독이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일본의 게이샤영화에 왜 장쯔이, 콩리 등 중국과 홍콩의 톱스타들이 주연을 맡았으냐는 것이다. 물론 와타나베 켄(渡辺 謙), 야쿠쇼 코지(役所 広司), 모모이 가오리(桃井香), 구도 유키(工藤夕貴) 등 일본 배우들도 출연하고 있어 일본인들에게 조금은 위안을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장쯔이와 콩리 등의 기모노(着物)에 대해, 허리띠(帶=오비)로부터 발 사이가 너무 길다, 즉 허리띠의 위치가 너무 높다는 등으로 일본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중국에서도 이 영화는 급거 공개가 중지되었다. 중국계 여성들이 일본 게이샤의 역을 맞는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중국인들은 '자존심' 정도가 아니라 '굴욕적'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중국, 한마디 해줄까? 그럼 너희들이 내놓을 만한 것은 뭐가 있는데? 어린 청각장애자들이나 모아놓고 곡예하고 노래하고, 그걸 또 예술이라고 TV로 대대적으로 방송이나 해대고...애들 그만 혹사시키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네!!)
아무튼, 이 '게이샤의 추억'은 일본이나 중국,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영화였다.
세계 흥행 영화의 메카인 헐리우드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고, 세계적인 흥행 장사꾼(?) 스필버그가 후원했으며, 실제로 게이샤 경험을 가진 문화인류학자 댈비가 고증을 한 작품이었기에, 이 영화는 애초 충분히 관심을 끌만한 것이기는 했다.
실제로 볼거리는 있었다. 기모노의 절묘한 색상의 대비, 황홀경을 안겨다 주기도 하는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 신비스러운 기예(伎藝)의 연마과정 등----미야코 오도리(都踊り)와 같은 전통 춤에서부터 노래, 사미센(三味線)을 최소한 5년은 배워야 하고, 다도와 꽃꽂이도 한다. 심지어는 정치까지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베일에 싸였던 게이샤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낌이 그리 선명하지 못했다고 평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날 수 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댈비가 게이샤 생활을 할 당시, 게이샤 공동체를 운영하던 "오카상(백무와 같은 여성)"들은 전쟁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로 아주 보수적였다. 이런 엄격한 보수주의 "오카상"들 앞에서 게이샤들은 자유인이 될 수 없었고, 황진이와 같은 적극적인 사랑을 추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게이샤 사회는 그후 현대화되어 간다. 1989년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在職期間: 平成元.6.3-平成元.8.10) 총리가 사임한 일이 있었는데, 그의 정부였던 한 게이샤와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게이샤들이 이렇게 대담해진 것이다. 어느 게이샤 견습생은 '오카상'과 싸우고 나서 프래랜서로서 자신의 유흥사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상전벽해'격인 게이샤 사회의 변화인 것이다.
황진이는 조선사회의 그 폐쇄적인 신분제도의 질곡과 속박속에서도 자유를 추구했고, 신여성, 근대여성으로서의 의식(意識)을 소유했으며, 사랑의 삶, 풍류의 삶을 살았다는데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