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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의 러브 어페어(Love Affair)와 박동규의 하하(母 : 어머니)
1952년 6. 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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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박목월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궁하게 살아가는 둘의 모습을 보자, 두 사람에게 힘들지 않으냐 물으며, 돈 봉투와 함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겨울 옷을 내밀고,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다.
목월은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시 한편을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절절한 사연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는 노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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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박목월의 아들)의 하하(母 : 어머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말해주곤 했던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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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찾아서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주운 가마니
두 장을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뻗은 호박넝쿨로부터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당신들이)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집안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께''라고 말했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은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해 가는 것이었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있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며 우시었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우리가 흩어지지 않아) 아버지를 볼 낯이 있게 됐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 같이 다 잃고 넋을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였겠지만, (그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어머니가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하게 해 준 정신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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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동규 교수의 글이었습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는 박목월 시인의 아내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주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자식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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