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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꾼 개혁 사상가 허균
허균은 호가 교산으로 1569년(선조3년) 양천 허씨로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허엽과 둘째 부인인 강릉 김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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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에게 글을 배워 부제학까지 오른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허엽은 허성, 허봉, 허초희(허난설헌), 허균 등 3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정치가나 문인이 되었다. 허엽은 첫 번째 부인이 1남 1녀를 낳고 요절하자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해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 막내가 허균이었다. 허균의 어머니는 두 번째 부인이었지만 예조판서를 지낸 김광철의 딸로서 명문가 출신이었다.
따라서 허균은 비록 서출은 아니었지만 이복형제들과 함께 자라면서 서얼들이 겪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러한 경험이 후에 <홍길동전> 속에서 서얼 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고 9세 때는 시를 지어 일찍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냈다. 어릴 때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동복형제로서 둘째 형 허봉의 친구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허봉은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18세에 생원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율곡 이이의 행적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서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종성으로 유배를 갔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방랑생활을 하다가 약관 38세에 금강산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런 허봉의 친구 이달은 비록 서자 출신이기는 했지만 이름난 시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첩의 자식은 과거를 치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서얼금고법’ 때문에 과거를 볼 수가 없었다. 이달은 가끔씩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에 취해 울분을 터뜨리고는 했다. 그러한 스승 이달이 서자 출신이라 해서 세상 사람의 멸시를 받는 사실에 대해 허균은 “낡아빠진 명분이나 제도 따위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대우를 받지 못하는가”라며 분노와 갈등에 빠져들곤 했다.
이처럼 허균은 어려서부터 사회의 모순에 대해 분노했다. 또한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그 성격이 소탈하고 서민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린 나이인 12세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읜 관계로 엄격한 가훈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냈으며, 스승 이달로부터는 이상향을 향한 꿈을 배우며 성장해 갔다.
이 시절에 허균은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형제자매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그보다 5세 많은 누나 허초희(허난설헌)는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데다가 시 짓는 실력이 뛰어났다. 천재적인 그녀는 4세 때 벌써 시를 지었으며, 4대 동안 문과 과거에 급제를 한 안동의 명문 집안 출신 김성립(승지 벼슬을 함)과 혼인을 하였지만 결혼생활 동안 내내 책을 읽고 시를 지었다. 비록 병이 들어 27세에 요절하였지만, 그녀는 조선시대에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울 만큼 섬세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의 둘째 형 허봉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에는 그의 누나 허난설헌까지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자 22세인 허균은 슬픔을 학문으로 이겨내면서 1589년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곧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그의 부인 김씨가 피난 중에 첫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비극은 그를 사회의 이단아로 만들었다.
결국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를 하고 황해도 도사(종5품 벼슬)까지 되었으나 한성에서 기생을 초청, 별실에 거처케 한 일이 문제되어 부임 6개월 만에 사헌부에 의하여 파직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교적인 명분과 엄격한 규율에 얽매인 양반 계급의 인간으로 굳어지지 아니하고 자유분방하고 시대를 초월한 풍운의 생애를 걷게 된다.
조정과 양반들은 그를 방탕한 인간이라고 비난하였지만, 그는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의 눈에는 오히려 위선에 찬 조정이 더 썩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성으로 돌아왔고, 그의 집에 자연스럽게 드나들던 서얼 출신 문인들이나 승려, 무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한탄했고, 급기야 서출인 서양갑 등과 함께 서출에게도 임관의 기회를 달라는 청원서까지 제출했다. 그러다 보니 벼슬아치들은 그를 비난하였고 양반 자제들도 그를 배척했다. 그는 관직에서 멀어진 채 강원도 금강산에 머물면서 병서를 읽고 거사를 꿈꿨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기던 이복 형이며 맏형인 허성은 그를 설득해 다시 관직에 나가게 했다. 허성은 학식과 덕망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이다. 허균은 이런 형의 도움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춘추관기조관, 형조정랑 등을 지내고 1604년 수안군수를 지내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다시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계속 불교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을 높이 평가받고, 그에게 허난설헌 시집 등 4권의 시집을 건네주어, 이 시집들이 모두 명나라에서 출판되어 우리 문학을 중국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세 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게 평가하던 조정은 그를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하였는데, 이번에는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직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또 다시 네 번째 파직을 당하게 된다.
파직당한 뒤 그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기생 계생을 만나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냈고,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쌓아 인간 관계의 폭을 넓혔다.
그러다가 1609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자 종사관이 되어 영접했으며,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형조에 속한 정3품 벼슬)가 되었다. 하지만 1610년에 있었던 과거에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하였고, 1613년 영창대군을 죽인 계축옥사와 관련하여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당시 조정 실세인 정인홍.이이첨 등의 대북파에 가담하였다. 이때 허균은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1615년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의 책임자가 되어 두 번이나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특히 두 번째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 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교산 허균은 좌참찬(의정부의 정2품 관직)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가 좌참찬이던 1617년,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허균은 인목대비의 폐비를 찬성하고 나섰다. 그러던 중 인목대비를 모략하는 글이 그녀가 거처하는 경운궁에 던져졌다. 이 일을 주동한 사람으로 허균의 일파인 김윤황이 지목되었다.
허균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계속 공격을 받았지만 결국 허균쪽의 승리로, 폐비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은 유배를 떠났다. 이 시기가 그의 삶의 빛나는 절정기였다.
하지만 허균은 그 동안 자신이 모아온 세력으로 실제로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그 즈음 그가 쓴 최초의 국문소설이자 영웅소설이고 사회소설인 <홍길동전>에서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주인공 홍길동은 신분이 미천한 서자로서 한을 품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면서 서얼 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 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사회 혁신을 주장하며 율도국 같은 이상 국가의 건설을 꿈꿨다.
허균은 현실 생활 속에서도 홍길동 같은 생각을 지니고 조선 선비들이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상향을 꿈꾸며 20여 년 동안이나 준비했던 것이다.
영의정 기자헌이 유배를 떠나던 그해 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비밀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렸다. 이에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려 일이 마무리될 무렵인 1618년 8월 10일 새벽, 갑작스럽게 남대문에 격문이 붙었다. 불쌍한 백성을 위해 광해군을 제거할 것이니 모두 도성에서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 현응민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사건의 배후자로 다시 허균이 지목되었다.
교산 허균은 <호민론>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백성이다”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힘을 모아 패도한 왕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해, 성리학이 지배 이념이었던 당시의 조선왕조 사회에 반하는 호민의 혁명사상을 설파하고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는데, 그는 이 정치 개혁 사상에 의거해 혁명을 실행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허균의 혁명적 활동에 대해 당시 권력자인 이이첨은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허균을 처형하라고 압박했다. 조정 대신들 또한 역적 허균을 하루빨리 처형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그를 아꼈던 광해군은 정확한 진상 조사를 대신들에게 명했지만, 허균에게는 변론의 기회조차 없었고, 자백도 판결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선왕조 시대라 해도 인명을 소중히 여겨 삼복계(사형은 세 번 반복해 심리를 한 뒤 결정해야 한다는 형사 절차상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고,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죄인의 자백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허균에게는 이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위해 최소한의 변론도 하지 못하고 반역자로 몰려 1618년 50세의 나이로 능지처참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홍길동전>은 당시 조선 중기 사회의 양반과 민중들의 사고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임을 알 수 있으며, 서얼 차별 문제를 비롯한 사회 계급의 불평등 문제 등을 혁파하려는 혁명 사상을 고취하여 가히 혁명 사상의 교과서로 민중에 널리 보급되었다.
교산 허균이 남긴 소설은 <홍길동전> 이외에도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남궁선생전>, <장생전> 등이 있다.
교산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자신이 이상향으로 여기던 사회를 건설하려 했고, 또한 현실 세계에서도 혁명을 통해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사회 변혁 사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이후에도 조선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일례로 홍길동은 후대의 박지원에 의해 ‘허생’으로 재탄생되어 혁명사상을 잇게 되었고, 민간에게는 사실적 인물로 전해져 전라도 영광의 ‘홍길동 마을’에 대한 전설을 낳고, 공주 유구에는 홍길동이 쌓았다는 ‘산성 전설’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허균의 출신지인 강릉에서는 오늘날 <홍길동전>에서 나타난 혁명사상을 진취적으로 조명하고 허균을 추모하는 문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한년참기>, <한정록>, <학산초담>, <성수시화>, <국조시산>, <허문세고>, <고시선>, <당시선>, <송오가시초>, <명시가시선>, <사체성당>, <동정록>, <계축남유초>, <을병조천록>, <서변비로고>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대부분이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고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 혁명을 실행하려 했던 허균은 여러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고,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 받는 민중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주장을 피력하고 몸소 실천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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