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 최고의 시인 정철
정철(鄭澈)은 본관이 연일(延日)이요 호가 송강(松江)으로 1536년 한성부 종로방 장의동(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녕부 판관을 지낸 아버지 정유침과 어머니 죽산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병조판서, 증조부는 김제군수를 역임했으나, 할아보지 대에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아버지 정유침의 첫째 딸이 인종의 후궁인 귀인(貴人)으로, 둘째 딸이 왕족인 꼐림군 이유의 부인이 되었기에 정철은 어려서부터 그의 두 누나들 때문에 궁중에 드나들었고, 자연스럽게 같은 또래의 어린 경원대군(후에 명종 임금)과 친구처럼 지냈다. 정철은 7남매 중 막내 아들이었고 그가 태어날 때 위로 형 세 명과 누나 세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철이 어릴 때 항상 정국이 어지러워 그의 가족도 온갖 정치적 핍박을 받았다. 임금인 인종이 갑자기 병으로 죽고 정철이 10세 때인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그의 매형인 계림군이 윤임에 의해 추대받았다는 이유로 역모죄에 연류되어 처형당하고, 그의 첫째 형도 전남 광양으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아버지 정유침도 함경북도 정평으로 유배되었다. 따라서 어린 정철도 아버지가 유배될 때 정평으로 따라가는 등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다가 곧 유배가 풀리자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1547년(명종2년)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 벽서 사건이 터지면서 관련자로 지목된 그의 아버지 정유침은 경북 영일로 다시 유배되었으며, 그의 첫째 형도 다시 붙잡혀와 모진 고문을 받고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길에 형독으로 32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의 둘째 형 또한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남 순천으로 은거하였다. 따라서 어린 정철은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1551년(명종6년) 그의 아버지가 특별히 사면되자 온 가족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군 창평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담양 창평은 정철의 실질적인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15세가 된 정철은 이곳 성산 기슭의 송강(松江) 가에서 김윤제, 임억령,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서 10여 년 동안 수학하는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 등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하였고 이때 이이, 성혼, 송익필 등과도 교우했다. 그리고 이때 그가 거주하던 곳의 지명을 따서 그의 호를 ‘송강(松江)’이라 지었다.
그 뒤 스승인 김윤제의 사위인 류강항의 딸과 혼인하여 김윤제의 외손녀 사위가 되었다. 을사사화 이후 그의 가문이 연루되어 몰락하였으므로 이때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하여 김윤제 등 외가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아 근근히 연명하였다.
그리고 이 시절 스승 기대승과의 일화도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 어느 날 산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러 어떤 제자가 기대승에게 물었다. “ 스승님! 이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경치에 비할 만큼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이 있겠습니까?” 이에 스승 기대승이 “정철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여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정철은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25세 때인 1561년(명종16년) 정철은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27세 때에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명종 임금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이때 명종 임금이 어린 시절의 친구인 정철을 알아보고 무척 기뻐했다.
정철은 홍문관 정자로부터 여러 가지 벼슬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그는 또 홍문관 수찬, 교리,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32세 때 친구인 율곡 이이와 함께 호당(湖堂: 젊은 문관 가운데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전문 독서연구기구로 독서당이라고도 함)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40세인 1575년(선조8년) 다시 벼슬길에 나가 홍문관 직제학, 사간 등을 역임했으나, 이 무렵 본격화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이때 계속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43세 때인 1578년(선조11년) 선조 임금이 간곡하게 다시 불러 동부승지,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인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해가 풀려 45세 때인 1580년(선조13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시인으로서 가사 ‘관동별곡’, 시조 ‘훈민가’ 등 아름다운 우리말로 명작들을 남겼다. ‘관동별곡’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관동8경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가사이고, ‘훈민가’는 백성들에게 알리거나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표현한 16수의 시조로써, 그는 가사문학과 시조의 대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583년(선조16년)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년)에 사직하고 다시 고향인 담양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여러 편의 가사와 수십 편의 시조를 썼다.
고향에서 4년을 보내고 나자, 다시 선조 임금이 불러 우의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런데 이때 조정에서 세자를 책봉하게 되어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과 함께 셋이서 총명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리고 선조 임금에게 함께 건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건의하는 자리에 빠지고 유성룡과 함께 참석했으나 온건한 유성룡이 머뭇거려서 직선적인 성격의 정철이 혼자 광해군을 강력하게 세자로 추천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신성군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리하여 송강 정철은 파면과 동시에 경상도 진주, 평안도 강계로 돌아다니며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마침 그 다음 해인 1592년(선조25년) 7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그때 영의정 이산해가 피난을 주장해 서인에서 그를 탄핵해 파면시켜서, 다시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고 그는 의주까지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 및 전라도의 제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평양을 되찾은 뒤 1593년 5월 개성과 서울을 회복한 일로, 조선에 5만 군사를 보낸 명나라에 사은사로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계속된 당파 싸움 속에 동인들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의 송정촌에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다가 그해 1593년 12월 병으로 58세에 생을 마감했다. 정치적으로는 유교 정치를 신봉한 율곡 이이와 송강 정철은 서인 세력의 거두였으며, 특히 율곡 이이가 걱정할 정도로 송강 정철은 술을 좋아했으며 성격 또한 직선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호방한 성품 탓에 정적인 동인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특히 송강 정철이 위관이 되어 동인 정여립 등 천여 명을 3년 간에 걸쳐 역모죄로 처형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정철이 동인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정치적 탄압을 무리하게 강행했다는 주장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문학적으로는 송강 정철은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이름이 높다. 그의 호방하고도 낭만적인 시풍은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훈민가>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사와 한시 등을 남겼고, 저서로는 문집인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추록유사>,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고,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 별사에 제향됐다.
특히 그의 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비롯한 전원시풍을 받아들였는가 하면,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상 세계를 추구한 이태백의 호방함과 풍류에 비견할 수 있는 조선 최고의 낭만주의 시인으로 평가할 만하다.
@
반응형
'웹(web) 인기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화) 어느 가난한 학생의 도둑맞은 신발과 인생 성공 스토리 (0) | 2025.02.04 |
---|---|
시련(試鍊) (0) | 2025.02.03 |
혁신적인 북학 사상을 전개한 박제가 (0) | 2025.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