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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대학자 서경덕
서경덕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낸 아버지 서호번과 어머니 보한한씨 사이에서 송도(지금의 개성) 화정리에서 1489년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당성(唐城)이고 호가 복재 또는 화담이다. 그의 아버지 서호번은 송도에 사는 보안한씨에게 장가들면서 송도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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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할아버지 서순경과 서호번은 대를 이어 하급무사를 지냈지만 그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그런 어려운 집안이었지만 어머니 한씨가 중국의 대학자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며 그를 낳았다고 한다. 서경덕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스스로 말과 글을 터득하였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서당에서 조금씩 한학을 배우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정치사상을 논한 유학 경전)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18세에 이르러서는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면서 이 구절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독서보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우선이라 여겨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처럼 그는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하다가 조금 눈을 붙이면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기도 했다. 게다가 방안 벽에 세상의 모든 사물들 이름을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들을 규명하려고 애쓸 정도였다.
이처럼 학문에 대한 지나친 몰두로 건강을 해친 서경덕은 1509년 9중종4년) 요양을 위해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 등을 유람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그는 31세 때 정치 개혁가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중 34세 때 다시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 전국의 이름난 산과 큰 내)을 돌아보려고 유람을 떠났다. 특히 속리산, 지리산 등에 오른 그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시를 짓기도 하는 등 무한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는 제자 이지함을 데리고 지리산에 올랐고 그 언저리에서 은거하는 대곡 성운과 남명 조식을 만나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당시 학자인 성운과 조식은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거절하고 철저하게 은둔의 삶을 산 선비들이다.
이들은 서로 어울려 시와 술을 주고받았고 ‘임천(林泉,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에 묻혀 사는 생활)’의 뜻을 노래했다. 이들 서경덕과 조식은 한양에서 벼슬도 하며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이황과 이이와는 대조적으로 은둔을 택한 선비들이었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정통 성리학자 이황은 조식과 같이 경상도에 살면서 때로는 격려도 주고받았지만 때로는 서로 틈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이이와 서경덕도 같은 경기도 출신으로 이이가 기철학의 원조인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의 학설을 배워 학문의 밑거름으로 삼기도 했지만 성리학의 정통에서 벗어난 서경덕을 부분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531년(중종26년)에는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으로 서경덕은 43세의 늦은 나이에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인종 즉위년) 김안국 등 일부 관료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후릉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서경덕과 동시대 인물인, 중종 때의 조광조.김정 등과 인종 때의 이언적 등이 현실정치에 적극 진출하여 문제해결을 하려고 한 반면, 그는 이것을 모두 공리공담(空理空談,실제로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말)으로 보고 수신제가(修身齊家,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돌봄)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서경덕이 이처럼 은둔의 학자로 지내고자 했던 것은 혼란한 시대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50여 년 동안의 시기는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절정으로 치닫으면서 참혹한 정치투쟁으로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는 4대 사화가 일어난 기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참여를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서경덕은 특히 예학에 밝아 그 실천에 앞장섰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생활하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임금 중종이 죽었을 때 당대의 관료들과 선비들이 상복을 입지 않고 다만 흰 갓과 백의를 3년간 걸쳤으나, 서경덕은 “임금의 상에 어찌 상복이 없어야 하겠느냐”라고 주장하며 3개월간 상복을 입어 세인들을 감복시켰다고 한다. 또한 인근의 백성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관청보다도 그를 찾아 상의하며 해결책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배우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어느 누구라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은둔생활에 몰두한 덕분에 독자적인 ‘기철학’이라는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후대 조선의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원이기’,’이기설’,’태허설’,’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혔다.
서경덕은 기(氣)와 이(理)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기(氣) 속에 이(理)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여, 우주는 어떤 원리인 이(理)와 그 작용인 기(氣) 둘로 형성된 것이라고 설파한 정통 성리학자 주희와 이황 등과는 다른 주장을 폈다. 즉 그는 물질의 힘이고 운동이며 우주의 기운이기도 한 ‘기’는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이’는 ‘기’ 안에 존재해 있으므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곧 서구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유사한 주장으로 서로 비교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심지어 죽음조차도 생물에게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힘,기운)’가 우주의 ‘기(힘,기운)’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즉 ‘생사일여(生死一如,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뜻)’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 그의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곧 독자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완성하는 성과를 낳았다. 게다가 그의 독특한 철학은 이황과 이이 같은 대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또한 그는 시와 술을 가미한 풍류를 즐기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기생 황진이와의 고상한 일화도 전해지며, 화담 서경덕은 박연폭포,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송도의 유명한 세 가지의 것)’로 불려지기도 했다. 당시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한 기생 황진이가 고결한 대학자 서경덕을 흠모한 나머지 그를 직접 찾아가 유혹했으나 서경덕은 추호의 흔들림이 없이 훌륭한 도학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곧 그의 고매한 인격에 매료된 천하일색 황진이는 최초로 그를 스승으로 받들고 만년에 함께 교유하며 그의 곁을 지키며 일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은둔의 대학자인 그에게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왔는데, 첫째 부류는 박순, 허엽, 박민헌 같은 명문 출신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요, 둘째 부류는 이지함, 강문우, 정개청, 서기 같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양반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면서 호가 토정(土亭)이고 본관이 한산(韓山, 지금의 충남 서천)인 이지함은 <토정비결>을 저술한 학자로 유명하다.
화담 서경덕은 1546년(명종1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1575년 선조 때에 이르러 제대로 평가받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지고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사후 그의 학문은 남인의 거목 윤휴와 허목 등에 면면히 이어졌으며, 정조 때 영의정 채제공과 그의 정치적 제자 정약용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직접 사물의 탐구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실험적, 과학적인 학자로서 독창적인 ‘기철학’ 체계를 완성했다는 것은 높게 평가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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