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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인 북학 사상을 전개한 박제가

이호(李浩) 2025. 2. 3.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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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인 북학 사상을 전개한 박제가

 

박제가(朴齊家)는 1750년(영조26년) 승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밀양(밀양(密陽)이고 초정이 그의 호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서울 남산골 아래서 보냈으며, 11세에 부친을 잃은 후에는 어머니의 바느질 품삯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며 자주 이사를 하는 떠돌이 신세로 지냈다. 당시에 서자는 관리에도 임용되지 못하는 등 숙명적으로 불우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초정 박제가

    

그렇지만 활달한 성격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그는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많은 고전을 섭렵했고, 특히 시와 서예에 출중한 재능을 발휘하여 소년시절에 쓴 글들이 명사의 서재에 장식될 정도였다.

 

박제가는 가정적으로 비록 불우하였지만 유독 훌륭한 친구와 스승이 많아서 스스로 드문 일이라고 자부하리만큼 복이 많았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으로 인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지만 18세 때 당대의 석학들인 이덕무, 유득공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북학에 열을 올렸다. 그가 9살이나 연상인 이덕무와 평생을 나누는 벗이 된 것은 그들 출신이 모두 서얼인데다 시와 북학에 대한 열정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연을 맺은 뒤로 줄곧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둘의 뜻이 북학에 있음을 깨닫고,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또한 북학퍄의 시조로 일컬어지던 홍대용의 가르침도 구했다.

 

당시 북학을 추구하던 젊은 선비들은 한결같이 청나라를 방문하여 그곳의 선진문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을 갈망하였다. 홍대용과 박지원 주위에 많은 청년들이 모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박제가는 그 청년 무리들 속에서 서얼 출신인 유득공과 양반 출신인 이서구도 만났다.

 

유득공은 1749년 진사 유흔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문과에 응시하지 못했고 박지원 문하에서 비슷한 처지의 인재들과 교류하며 실학사상을 공부해 갔다. 30세 때인 1779년 검서관으로 뽑혀 당대 지식사회로부터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와 함께 ‘4검서’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제천, 포천, 양평 등지의 군수를 지냈고 중추부 첨지사까지 올랐다. 첨지사면 정3품 당상관 격이었다.

 

그는 북학파의 실학자였으나 우리 역사의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시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발해고>는 그가 검서관으로 있으면서 궁중에 보관된 조선과 청나라 및 일본의 사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하여 그동안 매몰된 발헤의 역사를 고증한 결실이다. 그는 통일신라가 삼국의 통일을 완성한 것으로 보지 않고 북조(北朝)의 발해와 남조(南朝)의 통일신라가 대치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남북국 시대의 이분화 체제로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체계를 세우지 않음으로써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을 수 있는 명분을 영원히 잃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유득공의 역사적 견해는 체계적이면서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후손들은 그가 고증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광활한 옛 영토를 회복해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박제가가 청나라 여행을 꿈꾸고 있을 즈음, 정조는 당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서얼 차별을 없애기 위해 ‘서얼허통절목’을 공표했고 이 덕택으로 박제가는 꿈에도 그리던 북경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1778년(정조2년) 당시 채제공이 그와 이덕무에게 기회를 주어 청나라 사은사 행렬에 합류할 수 있었다. 채제공은 이들이 북학에 조예가 깊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가 때문에 방문단의 수행원으로 정했다.

 

박제가는 3개월간 연경 일대를 여행하면서 열정적으로 청나라의 문명을 살피기 시작했다. 또한 홍대용의 소개로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문명의 이기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고, 그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으로 그것들을 접하며 체험한 모든 것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돌아와 3개월 만에 그 유명한 <북학의>를 집필 완료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국가와 민중의 가난, 즉 궁핍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북학파의 사상을 가장 용기 있게 대변하였으며, 저항과 개혁사상이 함께 담겨있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박제가의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주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내외 두 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내편에는 수레, 배, 성, 벽, 궁실, 도로, 교량, 소, 말 등 생활에 필요한 기구와 시설 등이 서술되었고, 외편에는 전제, 농잠총론, 과거론, 관론, 녹제, 재정론, 장론 등의 정책과 제도가 서술되었다.

 

그는 이 책 속에서 청나라의 생활도구와 조선의 것을 비교하기도 했지만 우리 조선의 국가정책과 제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과거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에 따른 관리등용제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경제문제에 관해서도 생산보다는 소비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국제무역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당시로서는 그의 주장이 선각자로서 가히 혁명적이고 근대적인 주장이어서 일부에서는 그를 지나친 이상주의자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개혁군주 정조는 당시 급진적 개혁가이고 사상가인 박제가를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하였다. <북학의>를 통해 북학의 개념을 정리한 그는 정조의 서얼차대 폐지책에 의해 1779년(정조3년) 이덕무, 유득공 등의 서얼 출신들과 함께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규장각에 배치되었을 때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이라는 사가시집을 출간하였는데 그것이 청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3년간 규장각에 머물면서 그곳에 비장된 서적들을 탐독하는 한편,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수많은 책들을 교정하고 간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줄곧 정조에게 신분적 차별을 철폐하고,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를 위해 청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는 1790년(정조14년)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 황인점을 따라 두번째 청국 길에올랐으며, 돌아오는 길에 왕명에 의해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제23대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검서관이던 그를 임시로 정3품 군기시정으로 임명하여 별자 사절로 보냈다.

 

도합 세 차례 청국을 왕래하면서 청의 학자와 문인들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청 학계의 원로인 예부상서 기균과 담론한 것은 유명하다. 기균은 그를 만난 후 “조선에 저런 박식하고 고귀한 학자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이처럼 박제가의 인격과 식견, 그리고 시.서. 화의 절묘한 경지는 중국에서 더욱 명성이 자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우리의 생활에 북학의 활용을 주장하고 나선 박제가는 국가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수레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나라는 산길.고갯길이 많아 수레가 없었다. 수레가 없으므로 물자의 교류가 막혀 바닷가에서는 미꾸라지가 거름으로 쓸 만큼 흔하지만 서울에서는 귀했으며, 보은의 대추, 함경도 육진의 마포, 관동의 꿀이 산지에서는 천하고 다른 곳에서는 귀하여 사회적 빈곤이 가중되어 갔다. 따라서 여느 지식인처럼 청국을 왕래한 박제가도 수레가 얼마나 큰 구실을 하고 있는가를 목격하고 “청국에서 수레 만드는 기술을 도입하여 수레를 널리 이용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북학은 이와 같이 수양이 아니라 주로 경제생활의 개량에 있어서 청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자는 이론인 것이다. 이를테면 청국에서는 벽돌이 여러 가지로 이용되어 견고한 주택.창고.성벽이 마련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조선은 무진장한 흙과 물과 나무를 쓸 줄 몰라 하나도 반듯한 집이 없어 불편한 것을 통탄할 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벽돌 만드는 뛰어난 기술을 청국에서 배울 것을 역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농기구.수차(水車) 등을 수입하여 똑같이 만들어 이를 보급시켜 우리의 불편한 농기구 및 영농기술을 개혁하여 농업의 생산성을 높일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독특한 상업관에 있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중농을 위해서는 상업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의견 즉 농업과 상업의 관계를 대본과 말업(末業)으로 간주하고 화폐 유통의 억제를 주장하였다. 소비 억제. 사치 금지론이 일색이던 당시에 박제가는 상업의 효용과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기반이 되는 생산의 진흥을 역설하였다. 그는 “경제란 우물과 같은 것이니 줄곧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강조했다. 또한 “생산된 것이 소비되어야 재생산도 가능하니 덮어놓고 소비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생산 진흥에 치중해야 한다!”는 근대적인 주장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민.수공업자의 생산 의욕마저 위축 감소시켜 생산자체를 마르게 하는 것은 놀고먹는 양반 수요의 과잉에 있다.”고 주장했다. 놀고먹는 양반으로서 몸소 농사라도 하면 벌써 상민이 되었다고 교제를 끊고 혼인길.벼슬길이 막히니 제도와 관습 자체가 유식양반을 파렴치한 상민 수탈 즉 토색으로 몰고 있었다. 이리하여 “양반도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하여야 되며 또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묵인하여야 한다!”는 등의 뛰어난 논리를 제시했고, 실제로 일부 양반들은 하인을 내세워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에 박제가는 “유식양반들에게 자본과 점포를 나라에서 주선해 줄 것이며 국가적 장려로써 모든 상업에 종사하도록 하여 성공한 자는 표창하라!”고 강조하였다. 실로 이는 매우 선각적인 상업진흥론으로서 조선 봉건사회의 신분관념의 타파를 주장함으로써 신분적 질서의 기반을 뒤흔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해외무역을 할 것도 주장하였는데 이는 쇄국의 문을 열기에 앞선 98년 전(1778년) 일이었다. 국가가 빈곤에서 벗어나는 첩경은 청나라와 통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널리 서양제국과도 통상할 것을 우선적인 과제로 제시하였다. 그의 진보적인 식견은 서양 세력의 동양 진출의 물결에 따라 전해진 서구의 과학기술을 배우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청나라 천문대에서 일하고 있는 서양인들이 모두 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도에 정통하고 있으니 이를 초빙하여 청년들로 하여금 그 천문. 의약. 채광. 조선 등 과학기술을 배우게 하면 수년 내에 부국이 눈앞에 전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이단으로 몰린 천주교에 대해서 “천주교는 불교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고 그 과학기술은 불교에 없는 장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보수파의 견제를 무릅쓰고 나라를 위하여 소신을 강력히 표명했다.

 

또한 그의 진보적인 사상은 그의 독자적인 국방론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군비라는 것은 민중의 일상생활과 직결되어야만 비용은 안 들면서도 착실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라고 밝힌 <북학의>의 ‘병론’에서 군비, 기술과 생산력은 표리일체 관계를 이룬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를테면 “수레가 병기는 아니지만 수송, 보급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고, 벽돌을 쓰면 견고한 성벽이 구축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직접적인 군비는 아니지만 잘 활용하면 비용은 안 들고도 실속 있는 군비가 된다는 것을 그는 강조했던 것이다.

 

당시의 기득권 세력들은 박제가를 두고 급진적인 개혁론자라고 비난하였다. 그것은 그가 봉건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선진문물을 통해 조선사회의 질서를 개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의 개혁론은 집권세력들에 의해 철저히 묵살되었지만 개혁군주 정조는 언제나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당시의 많은 선각자들도 박제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박제가와 이들은 신분계급 철폐를 시대적 사명으로 여겼고, 새로운 세계관의 올바른 정립이야말로 앞으로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설파했다. 급진적인 개혁가 박제가는 용기와 통찰력을 가지고 구태의연한 조선 봉건사회에 엄청난 변화와 개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중 1800년(정조24년) 실학의 후원자였던 개혁군주 정조가 병을 치료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 금지를 명분으로 남인 일파를 완전히 숙청하고, 또한 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실학자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박제가 역시 제거 대상의 주요 인물이었다. 노론 집권층은 ‘윤행임 반역사건(신유사옥)’을 조작해 그를 가담 인물로 지목했다. 그는 반역 혐의를 끝까지 부정하며 죽기를 무릅쓰고 가혹한 심문을 견뎌냈다. 그러다가 결국 두만강 변의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804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지병으로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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