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
(1) 시부야(渋谷)와 신쥬쿠(新宿)--도회지의 오아시스(사우나 & 오솔길)
● 마쯔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 26) 피버가 일본열도를 흔들고 있다. 올해 메이저 리그에 입성한 다이스케가 4월 6일(金) 새벽 첫 등판하여 첫 승리를 올린 것. 아베 수상의 축하 코멘트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인들을 흥분시켰다.
양키스와 더불어 美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불리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제3선발을 꿰찬 다이스케는 캔자스시티 로얄즈를 상대로 무려 1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7회를 1실점으로 막아 승리투수가 되었다. 로얄즈가 약팀이긴 했지만, 개막전에서 보스턴의 에이스(제1선발) ‘커트 실링’을 두들겨 강판시키는 등 기세가 오를대로 올라 있는 팀이라, 다이스케의 호투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하와이 여행중에도 미국인들로부터 다이스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미국인들은 다이스케의 보스턴 입단소식이 들려올 때부터 이미 다이스케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이스케의 이적금은 1억 달라(약100억엔≒1000억원)였고, 올 그의 연봉은 7억5천만엔(≒75억원) 정도였다.
오만하고 콧대높은 미국의 超명문구단이 신인투수(미국에서는 누구든지 간에 신인)에게 이런 천문학적 거금을 투자했으니 놀랍기만 할 뿐이다. 이는 미국이 일본 야구를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야구 이전에 이미 미국은 일본을 인정하고 있었다. 동양에서 제일 먼저 미국에 인정받은 나라는 일본이 아닌가? 바로 진주만이라도 공격했던 것은 일본이 아니었던가? 미드웨이 해전부터 일본이 밀리기 시작했지만,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이오지마(硫黄島) 전투 등으로 놀란 것은 오히려 미국 쪽이었다.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아직도 현실주의(realism) 이다. 이상주의(idealism), 국제법, 과학주의, 다원주의(pluralism), 상호의존, NGO 등이 자리를 잡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국제사회에 적용되는 문법은 국가를 단위(actor)로 하는 현실주의(realism)이다. 즉 힘(力, power)에 의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냉혹한 경쟁사회인 것이다.
미국이 일본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일본의 힘(power: 군사력, 경제력)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진주만 기습과 태평양 전쟁을 치루면서 일본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된 미국은 일본을 묶어두기 위한 기발한 발상을 시작한다.
루즈벨트에 의한 “중국 대국화 구상”이다. 이는 말 그대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인접지역에 있는 중국을 키워준다는 구상이었고, 실천에 옮겨졌다. 루즈벨트의 “손 안대고 코풀겠다”는 국제전략이었던 것. 루즈벨트는 장개석을 전시회담(카이로회담, 포츠담회담…)에까지 참석시키면서, 무능하고 부패한 장개석 정권을 키워 주었다.
그러나 중국을 키워주고 이용하겠다는 이 전략은, 모택동이 중공정부를 세우고 장개석 정권의 지위까지 빼앗아 버리면서, 미국에 있어서는 결국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중국은 결국, 일본의 매서움을 경계하기 위하여, 미국에 의해 키워진 나라였던 것이다.
이야기가 국제정치, 국제관계론의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폭격을 당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현실주의(realism)의 관점에서 그토록 일본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됐다는 점, 바꿔 말하면 일본을 인정하게 됐다는 점이다.
야구 이야기로 돌아와,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도 있었고, 일본프로야구의 역사도 미국 다음으로 길고 하니, 다이스케에 대한 미국측의 그런 파격적인 대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부야 역전 광장 앞, 역전4거리의 고층건물의 대형스크린들에는 엄청난 음향효과와 함께 그 주일의 일본을 빛낸 스타들의 영상들이 흘러나온다. 이 스크린들도 이제는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하여 영상을 내보낼 것이다. 90년대 중반에 노모 히데오(LA 도자스)로부터 시작하여, 그후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마리나즈), 마쯔이 히데키(뉴욕 양키스)가 바톤을 이어받았으나, 이제는 마쯔카카 다이스케의 시대가 온 것이다. NHK 위성방송도 다이스케가 등판하는 全시합을 생중계할 예정이라, 다른 선수들은 이제 찬밥 신세가 될 듯하다.
● 3월 15일, 신칸센을 타고 우에노(上野)역에서 하차했다. 다시 야마노테(山手)선으로 갈아타고 시부야 역에서 내렸다. 하치공(公)의 동상이 건물을 향하여 안쪽으로 조금 이동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도쿄에서는 약 8년간을 살았다. 시부야에서 4년. 신쥬큐에서의 1년, 요쯔야(四谷, 소피아 대학 소재지)에서 3년을 지냈다. 그래서 도쿄는 나의 제2고향과 같은 곳이다.
우선 시부야의 옛사무실에 들러 구우재회(旧友再会)를 했고, 그동안의 밀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사무실을 떠난지도 벌써 몇년째인데, 아직도 내게 이런 저런 부탁을 해오는 걸 보니, 내가 실력은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점심대접을 받고 신쥬쿠로 향했다. 신쥬쿠의 사무실은 좀 축소는 되어 있었으나 반가운 얼굴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사무실이 위치해 있는 곳은 그 위치가 정말 좋은 곳이었다. 신쥬쿠 히가시구치(東口)를 나와, 도심 한 복판에으로 나있는 나무와 돌이 있는 오솔길을 통해 당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솔길 오른쪽 옆으로는 큰 신사(花園神社)가 하나 자리잡고 있어 역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물론 신쥬쿠 히가시구치(東口)를 나와, 가부키쵸를 따라 쭉 아래로 내려가면 한국플라자, 장터 등이 나온다. 일본에 온 뉴커머들은 이 한국플라자에서 비디오 테입을 빌려 한국 드라마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인터네트로 생방송을 볼 수도 있지만, 화면이 자주 끊기고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접속자수가 많을 때는 아예 접속도 안됨) 인터넷 생방송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신쥬쿠의 사무실 옛동료들과 함께 가까운 한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비록 ‘신쥬쿠에서의 짧은 1년간’이었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시간들이 그리워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요쯔야(四谷)는 시간이 없어 들릴 수가 없었고, 시부야로 다시 돌아왔다.
시부야에 24시간 영업하는 좋은 사우나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과 함께 다닐 때는 호텔 등을 이용하지만, 혼자 다닐 때는 이런 사우나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호텔은 보통 숙박료가 1일 1만엔 정도이지만, 사우나는 3,300엔이다. 무거운 짐을 든 여행객들도 짐은 사우나측에서 별도 보관해 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부야의 이 사우나는 내부시설도 잘 꾸며져 있다. 상당히 고급이다. ‘상당히 고급’이라는 말을 쓸 수 밖에 없다. 일본 사람들은 보통 집안에 목욕설비가 잘 갖춰져 있어 밖에서 목욕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극빈층이나 싼 셋집을 찾는 유학생들이 사는 동네에 1-2개 공중목욕탕(센토, 銭湯)이 있을 정도이다. 그냥 더렵혀진 몸을 씻고 나오는 정도이지, 센토에 휴식의 공간은 없다.
그러니 바깥에 이런 고급 사우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일본에서는 신기하고 파격적인 것이다. 프런트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절반은 한국 유학생이고, 레스토랑과 수면실, 휴게실 등이 한국식으로 잘 정돈되어 있고 서비스도 좋다. 휴게실에는 베드식 긴 푹신푹신한 의자에 TV 모니터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어 보고싶은 프로를 골라보면 된다.
내일부터 긴 여정이 시작되니 수면실로 가 일찍 잠을 청했다.
시부야 사우나 휴게실
레스토랑, 수면실, 그밖의 시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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