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또(人)/男子

5년 5개월만에 입 연 황우석--"나는 죽지 않았다"

이호(李浩) 2014. 2. 27. 09:17

[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황우석 박사 ‘그날’ 이후 5년 5개월만에 입 열다<上>

기사입력 2011-09-26 03:00:00 기사수정 2011-10-14 11:36:54

 

“사기꾼-서울대 말만 들어도 온몸 굳어… 대인공포에 자살생각도”

 

황우석 박사와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됐지만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죄인이다. 국민에게 연구 결과로만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정중했지만 단호한 인터뷰 거절이었다. 기자는 “한 번 만나나 달라”고 청했고 22일 만났다. 기자는 “국민은 박사께 연구비를 지원했다. 하지만 국민을 실망시켰고 2006년 한국 사회는 집단우울증에 빠졌다. 지금도 국민들은 ‘줄기세포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다. 최소한 연구 근황을 알려주는 게 도리 아닌가”라고 설득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할 것”이라며 완고했지만 기자도 집요하게 청을 넣었다. 마침내 23일 오후 11시 승낙 전화가 왔다.

이튿날인 토요일(24일) 수암생명공학연구원에서 그를 만났다. 황 박사는 실험 견(犬)에서 난자를 채취하는 수술을 준비 중이었다. 기자는 수술을 보고 싶다고 했다. 능숙한 솜씨로 배를 갈라 난소를 꺼내는 그의 모습에서 편안함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잠시 후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컴퓨터 옆에 청년 시절 황 박사가 황소 옆에서 밝게 웃으며 찍은 낡은 흑백사진이 보였다. 그 사진 위로 모든 것을 가졌다가 한순간 추락한 지금 삶이 겹쳐졌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바깥소식을 접했다면 (견디기) 어려웠겠죠. 신문 방송 인터넷 모두 독한 마음으로 끊고 살았습니다.”

―우울증은 없었나요.

“자살 생각 많이 했죠. 독극물을 주사할까, 목을 맬까, 약을 먹을까,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우울증 약도 받았는데 안 먹었어요. 약으로 지탱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불면증은요.

“오래 앓았습니다. 사흘 내내 못 잔 적도 있고.”

―항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나 같은 죄인이 국민께 무슨 더 할 말이 있다고 떠드는가, 염치가 없기도 했고…. 모든 사람이 뒤에서 나를 욕하지 않을까 심한 대인공포증에 시달렸습니다. 차라리 교도소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해외를 떠돌며 연구하는 낭인생활을 할 때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국 쪽 하늘을 보며 하루 네 번 108배를 했다고 한다.

“유배자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구했으니 죄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처음엔 ‘서울대’ ‘MBC’ ‘사기꾼’이라는 말만 들으면 온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큰 죄를 지었구나, 국민에게 큰 상처를 드렸구나, 괴로웠습니다. 모교에도 죄송함이 앞섭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구에 매진해서 마지막 논문에 ‘모교 서울대와 교수 학생 동창들에게 이 논문을 바친다’ 이렇게 한 줄 쓰는 게 마지막 남은 간절한 소망입니다.”

―돌이켜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과학자는 결코 양지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게 (과학자의) 숙명이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양지란 뭐죠.

“사회적 명예, 안락함, (한마디로)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거죠. 그것은 과학자의 길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무 생각이 없었죠. 천지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둥둥 떠다녔던 겁니다. 철이 없었던 거죠.” 그는 한때 잘나가던 시절, 두 사람에게서 들은 충고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한 분은 형제처럼 친한 학교 선배인데 어느 날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석아, 지위가 두 배 높아지면 네 배 겸손해도 (남들한테) 얻어맞더라. 조심,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는 김대중 대통령이었습니다.”

―DJ요?

“1년에 설하고 추석 명절에 동교동에 직접 우리 부부를 불러 점심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이희호 여사께서 직접 요리를 해주시고…. 그런데 2005년 설에 대통령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황 교수는 이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연 다니고 정치인들, 공무원들 안 만나도 되네. (그들이) 안 만나 준다고 (당신에게) 해를 끼칠 만큼 이제 약한 위치가 아니네. 본분에 충실하소.’ 그리고 그해 11월, 사고(MBC PD수첩)가 터졌죠.”

―그런 조언들을 듣고 어땠나요.

“당시 저도 ‘에너지를 너무 밖에 쓰고 있다’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용기와 결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인성이 갖춰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일이 터졌을 때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그토록 기대와 희망이 컸던 국민을 배신하고 물의를 일으킨 것 자체가 도덕적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구나. 살아 보니 도덕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모든 게 다 제 탓이었습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건달이나 다름없었어요. 과학자가 아니었어요.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나오는 순간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실험실 밖 세상은 좋던가요.

“터널(실험실) 안에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배고팠어요. 그런데 그게 진정한 행복이란 걸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찾았습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 달콤한 햇빛 근처에는 안 갑니다. 데어요. 화상을 입습니다. 따뜻한 곳에는 항상 불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1도 화상이냐, 저처럼 3도 중화상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지….”

―연구자가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강연활동을 하며 국민에게 성과를 알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그는 “굳이 핑계를 대자면 말이죠”라고 전제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전 마이너리티 학문을 했어요. 이른바 경기고등학교도 안 나왔고, 의대도 안 나왔어요. 외국 학위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연구비를 나눠주는 권력의 끈을 잡고 싶었어요.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우리 같은 사람 눈에 그건(권력)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권력 앞에 연구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시켜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사이즈가 커지다 보니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제게 (강연이나 만남) 요청을 하는 일이 많아졌고,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 연구비를 못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잠시 질문을 잊었다. 지방의 명문고(대전고)를 나왔고 서울대를 나오고 복제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가진 그가 ‘아웃사이더의 설움’을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가 짐 지우는 학벌 차별과 줄 세우기가 이토록 질긴 것이었나….

―‘아웃사이더 콤플렉스’야말로 성취의 동력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박사님도 그런 경우이고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콤플렉스를 동력 삼아 뛰는 사람들보다는 도저히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그런 사람이 더 많죠. 그들에게 장벽은 형벌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그 장벽 뒤로 숨은, 잠재력 있는 인재가 너무 많아요. 기회균등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기회가 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 제가 너무 이상적인가요?”

―어떻든 ‘마이너리티의 설움’을 극복하겠다는 박사의 열정과 집요함이 큰 성취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취 이후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취(醉)한 것은 아니었던가요.

“바로 그거였습니다. 평소 현명하게 자기성찰을 잘해 온 사람이라면 빨리 상황을 깨닫고 돌아가야 할 시점과 거리를 잘 알았을 텐데…. 전 그럴 능력과 의지가 부족했던 거죠. 그걸 깨달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아웃사이더인 나를 다시 버리는구나’, 이런 생각은 안 해 봤나요.

“전혀요. 이 사회는 저를 버린 적이 없어요. 제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갔기 때문에 뼈아픈 가르침을 주었으니 오히려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화제를 바꿨다.

―대통령이 줄기세포 연구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뉴스를 안 보다 보니 저와 가족, 연구원들에게 축하전화가 걸려 와서 발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정말로 미래를 보는 현명한 판단을 하셨다고 봅니다. 정책 기조가 다음 정권까지 갔으면 좋겠고요.”

―황 박사 연구팀의 연구 재개를 기대하는 전화도 많았겠군요.

“예…. (표정이 어두워지며) 전(前) 정권, 현 정권에 줄기세포 연구 승인을 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저의 삶은, 연구인생은, 줄기세포가 아니고는 없습니다. 이 연구는 인류 역사와 문화 사회까지도 바꾸는, 정보기술(IT) 혁명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 가는 순기능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평생 동물을 이용해서 만든 줄기세포를 언젠가 사람에게 적용해 보겠다고 확신을 갖고 매달렸어요.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지난 6년간 해외를 떠돌며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A에서 Z까지(복제에서부터 배양까지) 다른 기관의 협조 없이 순수하게 우리 팀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단계까지 왔어요. 그런데… 기회가 없어요. 염치없는 일이겠지만 제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국민들께 청하고 싶어요. 국민 세금인 연구비를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신다 해도 받을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 팀을 메인 팀으로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많은 훌륭한 팀을 키워 주시고 혹여 말석에라도 기회를 주신다면…. 이제 황우석이도 6년 동안 반성했으니 깨달음이 있을 것이고 역량도 축적했을 터이니 한번 해봐라…그런 마음으로 기회를 주신다면 석고대죄하며 죄 사함을 받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끊겼다. 열심히 메모하던 기자가 고개 들어 그의 얼굴을 보니 두 눈이 벌겋게 젖어들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http://news.donga.com/Main/3/all/20110926/406014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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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황우석 박사 ‘그날’ 이후 5년 5개월만에 입 열다<下>

기사입력 2011-09-27 03:00:00 기사수정 2011-10-14 11:37:15

 

중년부인 “전신화상 남편에 희망을” 연구소 정문에 5억수표 봉투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연구원들은 20, 30대가 대부분이다. 일요일만 교대로 쉰다. 휴가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썼다. 경기과학고, 미국 예일대를 졸업하고 듀크대 석사를 받은 황인성 연구원(26·유전자형질전환 담당)은 고교 3학년 때 학교에서 황우석 박사의 강연을 듣고 줄기세포 연구로 전공을 정한 ‘황우석 키드’다. 황 박사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63일간 검찰수사를 받은 뒤 두문불출할 때 서울대연구소에서 동고동락했던 연구원들이 매일 찾아와 용기를 줬다. 생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던 나를 지탱해준 건 제자들이었다”고 했다.

얼마 후 제자들은 “우리가 서울대를 포기하겠다. 따로 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총 33명 중 외국 유학생을 포함해 13명을 제외한 20명(전임연구원+석박사 과정)이 사기꾼으로 전락해 검찰에 기소당한 스승을 따라 나섰다. 안정된 연구기반을 버리고 스스로 바닥 생활을 택한 것이다.

“‘황우석이가 연구실로 쓴다더라’는 게 알려져 세 번이나 사무실 계약이 취소됐습니다. 고향 선배가 빌딩 사무실을 싼 월세에 빌려줘 구로동 70평 사무실에 둥지를 틀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운영비였다. 황 박사는 서울대를 나오면서 강연료, 인세, 외부 격려금이 있던 연구실 운영 통장까지 다 주고 나왔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동티모르 지원사업으로 황 박사와 인연을 맺었던 박병수 수암장학재단 이사장이 사재 수십억 원을 내놓은 것이다. 황 박사는 2006년 6월 박 이사장의 호 ‘수암’을 딴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을 열고 연구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동물복제실험은 경기 용인시 근처 농기구 창고를 빌려 한쪽을 베니어합판으로 막고 했다. 얼마 후 인척이 땅과 건물을 제공해줘 지금 위치로 옮기게 된다. 현재 수암생명공학연구원에는 서울대 때보다 많은 4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용인에 터를 잡은 직후인 2007년 3월 어느 날 아침, 연구소로 한 중년 부인이 전화를 했어요. 정문 현관 앞에 흰 봉투가 있을 것이니 연구 활동에 보태라는 거였죠. 놀라서 달려가 보니 5억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수표 추적을 해서 소재를 찾았는데 청주에서 건설업을 하는 부부였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일하다 전신화상을 입었다. 병마가 주는 고통이 너무도 커서 절망하던 차에 ‘황우석 줄기세포’에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일(황우석 사태)이 터졌다. 부디 요긴한 데 써 달라’며 거액을 내놓은 거였습니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초창기 시절 부인의 기부는 연구원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싹을 심어주는 불씨가 됐다. 황 박사는 그 돈으로 당시 제일 필요했던 초정밀카메라(세포를 살아 있는 상태에서 찍는 카메라)를 샀다고 한다. 15억 원짜리였지만 일본 니콘 본사에 편지를 썼더니 파격적인 가격으로 할인해 주었다. 짧은 김밥 점심이 끝나고 인터뷰가 이어졌다.

 

경기 용인시에 있는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전경.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제공

 

―돈 되는 사업을 할 생각은 안 했나요.

“연구소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옥석을 구분할 수 없는 제안들이 들어와 지뢰밭을 걷는 심정이었습니다. ‘이름만 빌려주면 거액을 후원하겠다’ ‘쓰러져가는 코스닥 기업을 싸게 사서 황우석 이름만 얹으면 ‘떼부자’가 된다’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황우석 관련주’ 어쩌고 하는 것들은 다 거짓입니다.”

―2008년 설립한 ‘에이치바이온’이라는 회사는 뭔가요.

“후원금을 공식적으로 지원받고 후원자들에게 연구 성과를 돌려준다는 차원에서 연구원들과 후원자들이 주주로 참여한 비상장 회사입니다. 이 회사를 바탕으로 안정적 수익모델을 만들어 연구원을 이끌어 가는 게 당면한 가장 큰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다시 줄기세포 연구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동물복제 능력을 향상시키고 복제부터 배양까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나요.

“동물 체세포복제줄기세포 연구를 계속하면서 기술이 쌓였습니다. 해외에서 제한적이나마 인간배아줄기세포연구도 해왔습니다. 그 결과 버려지는 난자 수를 줄여 복제배아 생산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복제배아를 줄기세포로 만드는 영양세포, 온도, 배양액 등 배양기술 노하우도 축적했습니다. 국내에서 연구 승인만 떨어지면 바로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각국의 줄기세포 연구 움직임은 어떤가요.

“선진 각국에 제자, 친구들이 포진해 있어 최근 소식을 빨리 전해 듣고 있어요. 한마디로 ‘전력질주’입니다. 매년 우리 연구원에 와서 강의도 하고 격려도 해주는 유승식 교수에 따르면 ‘내가 있는 하버드대 의대 교수들은 한국에서 황우석이라는 모닥불이 꺼져 가고 있다며 (즐겁다는) 표정 관리하기 바쁘다’고 전해주더군요. 2006년만 해도 한국이 유일했던 복제배아는 현재 최소 5개국에서 나왔습니다. 다행히 줄기세포주는 아직 안 나왔습니다.”

―제일 무서운 나라는….

“미국과 중국입니다. 특히 중국은 최고위층의 주도로 올해부터 8년 이내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 3가지 신성장동력 사업 중 하나로 줄기세포 연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미 복제배아를 성공시킨 기술력도 확보했고요. 지금 세계는 줄기세포 연구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누가 죽고 사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치열한 국가 전쟁터.”

―줄기세포 기술이 질병치료에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 와 있나요.

“머지않은 미래에 구체적인 성과들이 나오리라 예상됩니다. 줄기세포 실용화가 도래하면 그 파급 효과는 정보기술(IT) 혁명을 넘어설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 연구 승인이 안 날 경우 굳이 국내만 고집할 필요가 있나요.

“국익을 다른 나라에 넘길 순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이 글로벌이지 자기 나라에 뿌리를 두지 않는 글로벌은 머슴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해외 연구를 몇 차례 진행하며 조국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정부라는 공식적인 상의 대상이 없어져 버린 상태를 겪어 보니 부모 없는 고아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과학자를 다른 나라가 모셔간다고 해도(?) 결국 ‘이용’이나 ‘활용’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들(외국)은 겉으론 온갖 찬사를 늘어놓지만 결국은 싸구려 새경(품삯)을 주며 머슴으로 쓰고 싶어 할 뿐입니다.”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나를 공격하는 부메랑이 된 말입니다. 만신창이가 된 지금, 다시 뭇매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후배 과학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마지막 말입니다.”

―왜죠.

그가 오히려 되물었다.

“지금 내가 하는 연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한 기여입니까, 기여가 없는 과학이 있을 수 있나요.”

목소리와 눈에 결기가 스쳤다.

분위기도 누그러뜨릴 겸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영생(永生)의 시대가 오고 있나요.

“영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육체적 수명은 길어야 120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줄기세포 연구의 목적은 영생이 아니라 건강수명 연장입니다.”

―돈이 없으면 건강도 짐인데….

“이원적 해결책이 있다고 봅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지불하고 거기서 남은 수익금을 그늘진 곳에 사회보험적 차원에서 의료혜택을 주는 겁니다.”

―신(神)을 믿나요.

“그동안 종교계로부터 과분할 정도로 큰 힘을 받았습니다. 불교계뿐 아니라 1400여 개신교 목사님들도 저를 위해 탄원했고 격려금도 모아 주셨습니다. 저는 중2 때 영세를 받았는데 복제 연구를 하면서 신의 존재를 더 믿게 되었습니다. 신이 없다면 누가 제게 이 기술을 주었겠습니까, 분명히 뜻이 있는 겁니다.”

―그게 뭘까요.

“우리 인간들에게 ‘줄기세포를 통해 너희 병을 스스로 치료하라’고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제) 기술을 비윤리적으로 써선 안 되는 거지요.”

―복제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아닌가요.

“소, 개, 돼지를 많이 복제해 봤지만 선천적 유전형질은 거의 같습니다. 후천적 특성은 환경에 영향을 받고요. 신기하게도 같은 복제동물이라도 눈빛이 다릅니다. 저는 그걸 영혼의 존재라고 믿습니다.”

―지금 기술 수준으로 인간복제도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결코 허용되어선 안 됩니다.”

벌써 창밖으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기자는 그가 지난 일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질문을 좀 길게 던졌다.

―검찰수사와 재판과정을 통해 줄기세포들을 박사가 조작하지 않았고 조작된 사실조차 몰랐다는 게 드러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몰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지요. 노벨상이 그렇게 타고 싶었나요.

순간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대(복제)와 미즈메디병원(배양과 검증) 간 절대 신뢰와 존경이 깔린 협업이었다 해도 관리책임자였던 제가 철두철미하게 크로스체크를 해야 했습니다. 논문 제출을 재촉한 제럴드 섀튼 교수(피츠버그대·황 교수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으며 2005년 논문 작업을 주도했다)를 컨트롤하지 못했던 것도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비록 세계를 놀라게 할 연구 결과를 내긴 했어도 제 안에는 오랜 변방의식,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습니다. 한국 토종 박사에 영어도 미숙하고…. 지금에야 하는 이야기지만 국제학회와 저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섀튼 교수의 슈퍼파워에 주눅 들 때도 많았습니다.…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변명일 뿐입니다.”

황 박사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억울함, 원망, 분노 같은 감정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고 진정 깊은 참회를 했음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서는 두려움은 떨치지 못한 것 같았다. 빛이 아닌 어둠의 세계에서, 할 수만 있다면 세상과 문을 닫고 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황우석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말까지 있었다. 지금 그에겐 ‘사기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혹여 우리는 그를 실체보다 더 띄우고 실체보다 더 깎아내리진 않았던가.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는 법, 대한민국은 그동안 ‘황우석의 잘못’을 단죄하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그날’ 이후 6년이 흘렀다. 환상과 폄하와 트라우마(정신적 내상)까지 걷어내고 냉정하게 ‘사실’과 마주할 때가 됐다고 본다. 황 박사가 국제낭인으로 떠돌며 그토록 절감했다는 ‘조국에 대한 미래’를 걱정하면서 말이다.

용인=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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